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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의 교과서로 본 6.25전쟁에 대한 다른 시각

category 밀리터리 이야기/밀리터리 2016. 10. 1. 06:30

오늘은 국군의 날입니다.

벌써 68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은 6.25 전쟁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아시나요?

 

6.25 전쟁이 언제 일어났는가?

성인에게 물어봤을 때 10명중 3명이

이를 모른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중고생과 성인 천여명에게

물어본 설문조사에서는

6.25 전쟁 발발연도를

정확히 알고 있는 응답자는 성인 60%

청소년 40%에 그쳤습니다.

 

 

 

 

6.25전쟁은 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자

민족의 아픔입니다.

 

오늘은 각 나라별 교과서로 본

6.25 전쟁에 대한 시각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겠습니다.

 

회색 표에 있는 것이 교과서에

적힌 내용입니다.

 

 

 

 

 

 

1) 중국 교과서

 

 1950년 6월 조선 내전이 폭발했다. 

 

 미국이 단호하게 파병하여 조선을 침략 하였다.

 

미군을 주로 한 소위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곧바로 중국 변경 압록강 변까지 공격하였다

 

미군 비행기가 중국 영공을 침략해 들어와

 

중국 동북 변경의 도시를 폭격, 소사하였다

 

미국 제7함대가 중국 대만해협으로 침략해 들어와

 

인민 해방군의 대만 해방을 저지하였다.

 

미국의 침략 활동은 중국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위 내용은 중국의 인민 교육 출판사에서 나온

 '중국 역사 8년급 하'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중국은 많은 교과서에서 '항미원조(抗米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전쟁을 설명하려고 하였고

 이를 통해 중국은 미군이 한국전쟁을

 통해 중국을 위협하려고 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침공하는 중공군들

 

 

신중국이 대담하게 미국과 대결을 진행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해 당시 국내외에서는

 각양각색의 의논들이 있었다

 

미국은 세계상 가장 강대한 국가이며,

군대 장비가 가장 선진적이고,

또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신중국은 이제 탄생한지 1년밖에 되지 않아

 치유되어야 할 장기 전쟁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경제는 막 회복되기 시작하여 손봐야 할 일들이 많다.

 상호 이해가 같은 밀접한 관계, 즉 조선의 존망과

중국의 안전은 긴밀히 상관되며,

 항미원조는 바로 국가를 방위하는 것이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미국을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

중국도 상당한 부담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이 전쟁에

 참가해야 하는 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중국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고

또한, 이러한 전쟁에 대한 중국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는 미제국주의의

침략 정책과 전쟁 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조선의 독립과 중국의 안전을

보위 했으며 중국의 국제 위망은 전에 없이 제고 되었다.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는 미국이란 무적의 신화를 깼고,

미국의 전략 계획을 분쇄 하였으며,

중국의 경제 건설을 위해 평화로운 환경을 얻었다.

 

이를 통해 중국은 한국전쟁을 '승리'하였다고

여기고 있으며 자국의 세계적 위상이

올라갔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항복문서 싸인을 찍은 장면.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강탈하여 괴롭혔고,

패망하면서 6.25전쟁의 원인을 만들었다.

 

2) 일본 교과서
 

한국전쟁을 통해 일본은 경제적 호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습니다.

 

1945년 이후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고

이 시기, 실질적인 주권은 연합 사령부 측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전쟁에 관한 일본

교과서의 서술은 7줄 정도에 불과합니다.

 

신판은 「식민지의 해방과 아시아」의 항에서

 

「조선은 일본의 패전에 의해 식민지에서

 해방 되었지만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을 소련이, 남쪽을 미국이 점령하고

 이윽고 1948년 북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북조선)이,

 남에는 대한민국(한국)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1950년, 북한이 한국에 침공해

 한국 전쟁이 시작 되었습니다.

1953년에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쟁은 계속 되었습니다」(p.187)

 

조선은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 되었지만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을 소련에,

남을 미국에 점령당하여 1948년 북에

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남에는 대한민국이 수립 됐습니다.

 

 1950년 북한이 한국을 침공하여

한국전쟁이 시작 되었습니다.

 

 미국 중심의 유엔군이 한국을,

중국의 인민 의용군이 북한을

 각각 지원하여 전쟁은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위의 내용은 전쟁이 언제 시작 되었으며

언제 끝났는지에 대한 단편적인 서술입니다.

하지만 눈 여겨 봐야 할 대목은

대한민국과 북한을 주체적인

정부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미국 교과서

 

미국의 교과서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6·25 전쟁은 미국에서 흔히 잊힌 전쟁으로 불려집니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겐 절대로 잊힌 전쟁이 아닙니다.

 

  

남한과 북한의 각 정부는 통일된 한국을 원하였다.

하지만 남과 북은 그들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통일 되기를 원하였다. 북한군이 먼저 쳐들어왔다

 1950년 6월 25일에 약 9만의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38선 이남의 남한의 수도 서울로 내려왔다.

 

 

북한군이 남한을 선제 공격하여

전쟁이 발발되었다는 것은 여타 일본과

한국 교과서의 시점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드러나듯 남한 뿐만

 아닌 북한의 정부도 통일을 원했다는 것

 우리나라와는 다른 시선으로

 이 전쟁을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25동란 당시 청천강변에서 북한 인민군의 공격에

 M1919 30구경(7.62mm) 브라우닝

경기관총으로 대비하는 미군 - 1950년 11월 20일

 

 

맥아더는 북한군의 빠른 전진으로 인해

북한의 보급로가 약화될 것으로 파악하고

 이 약점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부산을 방어하기 위한 군대를 보낸 직후로

1950년 9월에 남한의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그리고 후방에서부터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 하였다.

 맥아더의 전략은 적중 하였다.

 

 

위의 글을 본다면, 인천상륙작전을 설명하기 보다는

맥아더가 어떤 지시를 내렸다는 것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한국전쟁의 전반적인 흐름보다는

이 시기 활약했던 미국의 인물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4) 북한 교과서

 

오래전부터 침략 전쟁을 준비하여 온

 

미제 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놈들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혁명력사』,2003, p.152.)

 

북한은 한국전쟁의 시작도 미국과

 남한에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

는 증거가 무수히 많이 보고 되었다.)

 

 앞잡이가 누구인지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용의 정황상

이는 남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이어서 전쟁의 결과에 대한 내용도 들어가 있습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대한 북한도

 미국의 침략으로부터의 승리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5) 한국 교과서

 

 

한국은 전쟁의 당사국인 만큼

이에 대한 서술이 많은 분량으로 되어있습니다.

 

 

남북 사이의 무력 충돌도 적지 않았다

지리산을 비롯한 남한 곳곳에서도 북

한을 지지하는 무장 유격대의 활동이 계속되었다.

38도선 곳곳에는 국군과 북한군 간에

크고 작은 충돌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이러한 충돌은 1950년에 들어 줄어들었으나 불안한 정세는 계속되었다.

 

 

미군의 철수 이후 38도선에서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 자주 일어났다.

 북한이 남침해 올 것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상호 방위조약 체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동북아 지역에서 한국의 군사 전략적

중요성을 낮게 평가한 미국은 한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의 요청에 따라 중공군에 편입 되었던

 한국인 3개 사단, 약 5만 명을 북한으로 보냈다.

중국의 공산혁명 이후,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지원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전쟁 전에 남과 북이 대립했다는 내용과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지원을

 했다는 내용이 동일하게 나와 있습니다.

 

 

(출처 - 통일부)

 

 이상으로 6.25와 관련된 4개국과

 북한의 교과서를 살펴 보았습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국가가 같은

 과거를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바라보고 있고 교육하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현재 우리나라 청소년의 50%가 6.25를

알지 못한다는 설문조사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관련글 - 6.25 전쟁에 참여한 16개국의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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