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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1월 22일 세계적인 통신사 AP는 토쿄 발로 아래와 같은 긴급 전문을 전 세계에 타전했습니다. ​다음 날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을 통해 국내에도 보도된 전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일본해상보안청에서 22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일본 함정 두 척이 독도에 설치되어 있는 한국 해안포의 사격을 받았다. 이 해안포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함정을 향해 총 다섯발의 포탄을 발사하였으나 명중하지는 않았다. 이 함정에 탑승 중이던 일본 해안경비대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독도에는 열 다섯 명 가량의 한국 군인들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 이 기사는 독도의 해안포가 공식적으로 언급된 첫번째 사건이었습니다.

▲1954년 11월 25일 경향신문에

 보도된 독도 해안포


같은 해 11월, 일본 잡지는 독도의 해안포에 관한 또 다른 기사를 실었습니다. 독도 정상에 지름 2백 밀리미터의 거대한 해안포가 관측되었다는 특집기사와 더불어 망원렌즈로 촬영한 해안포의 실제 사진을 내보냈습니다. 이 기사는 대포의 설치로 험준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독도는 이제 일본이 넘볼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는 구체적인 설명까지 곁들이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들은 그간 독도에서 물리적 충돌을 벌여 온 한일 두 나라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일본은 기습적인 해안포의 등장에 놀랐고 놀라기는 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 외무성의 항의서한을 전달받은 대한민국 정부는 곤혹감에 휩싸였습니다. 그것은 정부를 대신해 독도를 지키고 있던 의용 수비대가 일본 함정에게 선제 공격을 퍼부은 것 때문은 아니었고 한국 정부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해안포 자체였습니다. 당시까지 정부가 파악하고 있던 독도 의용 수비대의 무기는 중기관총과 경기관총 각 1정, M1 소총 20정과 권총 2정 그리고 박격포 1문이 전부였고 그것도 고물 수준이었습니다. 목록 어디에도 대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당에 해안포의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항의에 어리둥절한 상태였습니다.

이 이야기의 발단은 해안포 사건이 터지기 2년 전인 19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가까운 곳에 병참기지가 필요해진 미국은 일본을 새로운 시각으로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전진기지로서의 전략적 필요성이 대두된 것. 이런 이유로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진행된 대일강화조약은 일본을 옭아매던 전범국가로서의 올가미를 풀어주었고 일본을 아시아 반공진영의 교두보로 활용하기 위해서 미국은 특혜를 베풀었고 치고박고 싸우던 일본과 미국은 이렇게 한순간에 우호국이 되었습니다.

이에 일본은 기분이 좋았는지 한국을 상대로 새로운 도발을 기획합니다.​ 전쟁으로 정신이 없는 한국과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한 미국이 자신들의 도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한 일본 정부는 이 찬스를 살려 독도를 다시금 수중에 넣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1953년 5월부터 일본은 무장 순시선을 보내 하루가 멀다 하고 독도를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들면서 한국 어부들을 쫒아내기 시작했고 이는 사실상 실력행사를 통해 독도를 점유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1953년에만 일본은 총 다섯 번이나 독도에 상륙했지만 울릉도의 경찰병력은 이를 막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어느 틈에 독도는 서서히 일본 수산실습선의 구역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당시 한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보고 행동에 나선 것은 울릉도에 사는 주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참전용사를 중심으로 의용수비대를 구성했습니다. 울릉도는 한국전쟁 중에도 병력징집이 없었던 곳이었지만 자발적으로 참전한 용사들은 많았고 그들 중 50여명이 독도를 지키자는 외침아래 모여들었고 어류업으로 마련한 돈으로 구식 무기를 사들여 무장을 갖췄고 독도로 건너가 국기 게양대와 막사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일본의 함정들과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종일 받아봐야 물 한 바가지 나오는 샘물과 로프를 타고 기어올라야 하는 낭떠러지에 의지해 버텨야 했지만 그들에겐 독도를 이대로 두면 일본에 빼앗기고 말거라는 위기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이기 앞서 당연히 지켜야 하는 삶의 터전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습니다.

▲포대경으로 감시중인 독도의용수비대원


1954년 5월 23일 독도로 접근하던 일본 경비정이 독도의용수비대의 소총 공격을 받으면서 최초의 무력충돌이 발생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정부는 그들을 해적이나 무장한 표류자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석달이 지난 8월 23일, 또 다시 독도로 접근하던 일본 경비정이 600발 이상의 기관총 사격을 받자 비로서 독도 수비대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행색은 해적이나 다름없었지만 독도 정상에서 펄럭이는 태극기가 그들 눈에 들어왔고 이 곳은 한국의 영토이므로 무단으로 접근하면 사격을 개시하겠다는 명백한 경고도 전해졌습니다.

예상치못한 독도 수비대의 출현에 당황한 경비정은 다시금 퇴각했고 일본 경비정을 두 번이나 물리치고 나자 독도 수비대의 자신감은 높아졌지만 불안감 역시 높아졌습니다. 독도 수비대의 존재를 인식한 일본이 그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뻔했기 때문이고 다음 번에는 압도적인 화력을 동원해서 독도 상륙을 시도할 게 뻔했습니다. 절벽에 설치해둔 통행용 로프를 끊고 악으로 버틴다고 해도 이대로라면 독도 함락은 시간문제였습니다. 다급해진 그들에게 절실했던 것은 독기오른 일본 함정들을 물리칠 좀 더 강력한 무기였고 그건 바로 대포였습니다.

일본과 한국 모두를 훗날 깜짝 놀라게 만든 해안포는 이런 상황 하에서 등장한 것이었습니다.  해안포만 있다면 전력의 열세는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독도 정상에서 쏘아대는 해안포는 일본 함정에게 저승사자나 다름없었으나 대포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본토에서 대포를 구해 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통행로도 일일이 정으로 돌을 쪼아 만들어야 하는 마당에 꼭대기까지 대포를 옮기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홍순칠 대장과 독도 수비대 대원들은 고민끝에 대안을 찾아냈는데 대포를 가져올 수 없다면 위장으로 가짜 대포를 만들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다행히 그들에겐 군대에서 대포를 만져본 전문가들이 있었고 가진 장비를 동원해서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울릉도에서 가져온 커다란 향나무에 페인트와 에나멜을 발라 쇳덩어리의 질감을 연출했고 포대를 만들고 그 위에 방수포를 씌워 해안포 진지를 만들어냈습니다. 가까이서 본다면 눈치채겠지만 멀리서 보면 진짜와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동도 정상에는 거대한 나무 대포가 위용을 드러냈고 실전투입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1954년 11월 21일, 함정 두 척과 항공기까지 동원한 일본은 독도에 대한 본격적인 도발을 개시했는데 비행기가 독도 상공을 저공비행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는 동안 경비정들은 일제히 해안으로 접근하며 상륙을 시도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도발 양상에 독도 수비대는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총 동원해야 했습니다.

동도 암벽에 새긴 한국령 표식

독도 의용 수비대가 독도 수호 의지를

 다짐하며 바위에 새긴 '한국령' 글씨


경기관총과 중기관총이 모두 불을 뿜었고 쉴 새 없이 박격포탄을 발사했고 총 발사된 9발 중 8발은 바다로 떨어졌지만 그 중 한 발이 경비정을 정확히 명중시켰습니다. 검은 화염에 휩싸인 일본 경비정은 혼란에 빠졌고여기에 더해 독도 정상의 대구경 해안포가 일본 경비정을 향해 서서히 포신을 돌리자 일본 경비대원들은 혼비백산했습니다. 이미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해안포 한 방이면 전원 몰살될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전을 포기하고 방향을 돌려 함정이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도망쳤고 전투는 종료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독도에서 벌어진 가장 치열했던 이 날 교전의 결과로 만들어 진 것이 처음 언급한 AP의 긴급 전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박격포와 해안포를 혼동해서 함정이 해안포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으며 이 덕에 독도의 해안포는 기정사실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이게 그저 나무 대포일 뿐이라는 것은 알려지지 않았고 일본 잡지의 특집 기사까지 나오면서 해안포의 존재를 인식한 일본 함정들은 두번 다시 독도 근처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사정거리 밖 먼 바다에서 망원렌즈로 독도를 살피다 돌아가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임무수행이었습니다. 일본 순시선의 독도 침략은 중단되었고 더 이상 독도수비대를 상대로 도발하는 모험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은 독도수비대의 역할이 경찰에게 인계되고 실제 대포가 향나무 대포를 대체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나중에야 일본은 해안포가 나무로 만든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포탄대신 페인트로 무장한 나무 거포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낸 셈입니다.

식수와 식량도 충분치 않은 곳에서, 정부의 지원도 무기도 열악한 상황에서 3년 8개월 동안이나 독도를 지켜낸 독도수비대의 용기와 기지가 있었기에 독도에는 아직까지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말이 마치 상투적인 정치 수사로 전락해가는 요즘, 독도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에 대해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홍순칠 대장이 수비대를 조직하면서 외쳤던 말 역시 한국인이라면 한번쯤은 되새겨 봐야합니다.

 

"독도는 우리가 살아갈 양식을 얻는 바다의 논이요 밭입니다. 이 논과 밭에 참새가 날아들어도 쫒아야 하거늘 하물며 일본놈들이 침범하는 것을 어찌 구경만 하고 있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 밭을 우리가 지키는 데 모두 의병으로 동참합시다. 독도를 간섭받지 않고 평화롭게 고기잡을 수 있는 섬으로 키웁시다. 동지 여러분, 나와 함께 독도로 가지 않으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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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사한마음 2017.03.23 17:27 신고

    감사할따름입니다

  2. 통일한국을꿈꾸며 2017.03.24 16:47 신고

    나라도 하지못한일을 해낸 독도의용대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3. 민간인 2017.03.25 10:50 신고

    일본에 대처하는 자세는 예나지금이나 민간인들이 훨씬 뛰어나네요. 일본은 강하게 힘으로 맞서야 합니다. 약해보이면 먹으러 호시탐탐 노리는 종족들이죠

  4. 오대오 2017.06.14 13:41 신고

    독도는 우리땅
    대마도는 한국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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