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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한 무하마드 2세와 사절단 3명을 죽였다고 최강대국을 지도상에서 없앤 몽골제국의 창시자 칭기즈칸. 그 둘의 전쟁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몽골보다 12년정도 앞선 신생제국 호라즘은 당시 실크로드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징기즈칸은 동쪽에서 가장 큰 세력이던 금나라를 1216년 굴복시켰고 이후 그는 서쪽으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1218년,그는 중국과 유럽을 잇는 실크로드의 통행을 재개하자며 호라즘왕국의 샤 무함마드 2세에게 3명의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이는 전혀 무리한 요구가 아니였고 당시에는 당연한 외교였습니다.

무하마드 2세도 처음에는 이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는데 돌아가던 몽골 사절단이 호라즘의 북동쪽에 있던 오트라르라는 도시에 도착해 물건을 구입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왕의 동생이었던 총독 이날측이 있던 곳이였고, 이 어리석은 총독은 이 몽골 사절단들을 스파이로 몰아 전부 살해해버렸습니다.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징기즈칸은 한번 참으며 무하마드 2세에게 또 한번 정식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고 책임자 처벌과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무함마드 2세는 동생을 처벌할 수 없었고 감히 몽골족 따위가 우리에게 사과를 요구한다며 분노했습니다. 무하마드 2세는 어리석게도 또 사절단의 몇명을 죽이고 몇명은 얼굴을 흉측하게 망가뜨려 돌려보내고 칭기즈칸은 이에 크게 분노합니다.

1219년 분노한 칭기즈칸은 호라즘 정벌을 위해 15만명의 병력을 모으며 인간을 넘어선 무와 지를 겸비한 사준 사구도 그의 발 아래 집합 합니다. 역시나 어리석은 무하마드 2세는 징기즈칸의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무하마드 2세는 40만 명의 정예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거기에 자신의 영토에서 싸운다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또한 호라즘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과 몽골군의 예상 침입 경로 사이에는 사람들이 도저히 지나갈수없는 혹독한 조건의 키질쿰사막과 천산산맥, 남북을 가로질러 흐르는 시르다리야 강이 놓여 있기 때문에 더 안심할 수 있었고 더구나 징기즈칸을 들판에서 풀이나 뜯는 야만인으로 과소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천산산맥 지도와 실제 천산산맥


칭기즈칸은 몽골군을 4개 부대로 나눈 후 주요 부대를 아들들에게 맡겨 우군은 장남인 주치가 지휘하고, 좌군은 2남인 차가타이와 3남인 오고타이가, 중군은 징기즈칸 자신과 4남인 툴루이가, 별동대는 체베가 이끌었습니다. 징기즈칸은 두 방향으로 부대를 나누어 호라즘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한 부대는 호라즘의 북부지역을 향하는 아쿰 사막과 알라타우 산맥 사이의 황폐한 골짜기를 지나는 길로 보내고 다른 부대는 위구르 관문을 지나 투르키스탄 북쪽의 천산 산맥을 넘어갔습니다. 천산산맥 추위는 영하 30도가 넘는 인간이 버틸 수 없는 추위였기에 무하마드 2세는 상대가 겨울에 그 산맥과 사막을 넘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안일한 예상을 깨고 1220년 몽골군대는 오트라르에 도착했고 도시의 성채를 바라보며 병력을 포진했습니다. 장장 5개월 동안의 전투가 벌어졌으며 천연의 요새를 자랑하던 성안의 사람들은 더이상 지탱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고 결국 이들은 몽골군에 항복했습니다.  오트라르에 있는 모든 생명은 도륙을 당했고 성채는 뭉개져 평지로 만들어버렸으며 생명체라고는 개 한마리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칭기즈칸은 키질쿰 사막을 넘어 부하라로 향했습니다.

키질쿰사막은 무하마드 2세가 믿고 있었던 최후의 자연방벽이었는데 사실상 칭기즈칸 이전에는 키질쿰뿐만 아니라 대체로 그런 큰 규모의 사막을 횡단해 정복전쟁에 성공한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무하마드 2세는 여긴 못오겠지라고 제2차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죽음의 키질쿰 사막을 횡단하는데 성공했으며 이 놀라운 횡단은 역사가들에 의해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것과 같은 충격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무하마드 2세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4월 초에 들어서였고, 그때는 이미 칭기즈칸은 남쪽 사막 끝에 나타난 상태였습니다.

칭기즈칸은 바로 누루타를 함락시키고 부하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달린 것. 칭기즈칸은 부하라의 성문 한쪽의 포위를 일부러 풀어 주둔군을 성밖으로 나오도록 유인하였습니다. 결국 이 유인작전은 성공했고 4월 11일에 부하라는 함락되었습니다. 이로써 불과 한달 반 만에 수적으로 열세인 몽골군이 30만에 달하는 적을 격퇴하고 무력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토록 쉽게 망한 데는 물론 분노가 극에 달한 칭기즈 칸이 아들들과 4준 4구를 모두 데리고 15만의 대군을 동원해서 끝장을 낼 기세로 쳐들어간 것도 있지만, 무하마드 2세의 전략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전성기의 호라즘 왕조 영토


40만이라는 대군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이들을 모아 총 전력전에 나서지 않고 각자 도시에 박혀 각개 방어를 시킨 것이 패배의 요인이였습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모두 각개격파 당했습니다. 이 후 여세를 몰아 징기즈칸은 끝까지 상대를 추격해 호라즘의 마지막 요새 사마르칸트에 있는 11만의 투르크와 타직 병사들을 섬멸했고 사마르칸트를 탈출한 무하마드 2세는 징기즈칸의 추격대에 의해 정신없이 쫓기다가 카스피해의 작은 섬 아베스쿤에서 누더기 옷을 입고 굶주림 속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어 실크로드의 교역으로 번영하던 도시들이 모조리 파괴되어 역사에서 사라졌고 호라즘 샤 왕국의 모든 문화가 파괴되었으며 전 도시와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호라즘 왕국은 2년만에 멸망하였습니다. 전쟁후에도 몽골군은 이 나라의 포로들을 다른 전투에서 방패로 삼기도 하고 강제 참전시키기도 하는등 매우 잔인했습니다. 단 3명의 사절단을 죽이는 멍청한 짓을 하여 왕 자신과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은 물론 왕국과 성채는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되고 만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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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스맨 2017.02.10 20:12 신고

    윗대가리가 멍청하면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고생하지...헬조선 암닭과 세뇌지지자들이 잘 알려줘서 알고 있다.

  2. 그리고 2017.02.11 01:34 신고

    예나 지금이나 외교는 정말 중요하죠.. 특히 강대국 틈바구니에 껴있는 우라나라는 더더욱.. 현 상황을 보니 걱정이 많이 됩니다..

  3. 사드 2017.02.11 07:37 신고

    박근혜 어쩔?

  4. 궁굼 2017.02.11 08:43 신고

    제가 관심은 많으나 상식이 조금 약해서 그러는데요 질문 하나만 할께요.
    조선 이전의 통일신라 고구려 삼국시대 자료도 명확하지 않은게 많은데 몽골의 전투 기록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남아 있는걸까요?
    징기스칸의 사적인 생각들까지 글이 올라오던데
    추측인가요 아니면 난중일기 같은 어떤 근거들이 있는건가요?

  5. ㅋㅋㅋ 2017.04.07 20:29 신고

    그냥 동생 죽이지. 원래 권력자들은자신들 권력 잡으려고 일부러라도 죽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