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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지킨 5인의 포도대장 이야기

category 밀리터리 이야기/고대시대 2016.09.17 02:34

 ▲ 조선시대 품계와 현대의 직급표 비교

 

 

 

조선의 포도청은 조선시대 치안을 담당했던 기관으로

 현재의 대한민국 경찰청에 해당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군인 신분인

이들이 근무하므로 국가 헌병대에 가깝습니다.

 

 

조선의 포도대장, 내금위장은 

현재의 군인 계급으로 볼 때

중장, 군단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조선을 지킨 포도대장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이야기이다 보니 사진 자료가

빈약하다는 점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1. 미천한 신분으로 포도대장이 된 - 이양생

 

 

1423년(세종 5)∼1488년(성종 19).

 


조선 초기의 무신, 이양생은
그는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성실한 노력으로 부귀영화를 누린 인물입니다.

 


이양생은 어릴 때 집이 몹시 가난하였는데

한 때는 짚신을 삼아 장터에 내다 팔아

겨우 입에 풀칠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양생은 힘이 좋고 무예에 능하여

장용위의 군졸이 되었다가, 1467년(세조 13) 5월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졸병으로 출전하였습니다.

 

 

 

▲포도청

 

 

얼마나 용감히 싸웠던지

졸병으로서는 유일하게

 공을 세워 적개공신 3등에

책록되고 계성군에 봉해 졌습니다.

 

 

많은 전답과 노비를 상으로

 받아 하루 아침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얼 출신이기 때문에 높고 중요한 벼슬에는

 등용되지 못하였고, 평생을 겸사복(국왕의 경호원)으로

 있으면서 포도대장으로

전국 각지의 도적을 소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관악산 일대에서 항거하였던 악명 높은

고도, 김말응 등과 충주 수리산,

여주의 강금산(剛金山) 도적들을 소탕하였습니다.

 

나라의 3등 공신이 되어 도적이나

잡으러 다니는 일을 하는 사례는 없었지만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다고 합니다.

 

 

 

 

 

 

 

 

 

 

 

2. 세기의 호걸 임꺽정을 잡은 - 남치근

 

 

남치근 (~ 1570년)은 조선 의 무신으로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병마절도사,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습니다.

 

 

남치근은 기개가 높은 장수로 담력이

 크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였습니다.

 

 

 왜구의 침입을 막지 못한 제주 목사 김충렬의

 후임 목사가 되어 이를 격퇴한 인물로

조선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1560년에는 한성부 판윤에 승진하였으며,

이 해 경기, 황해, 평안 3도 토포사

( 각 진영에서, 도둑을 잡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가 되었습니다.

 

 

 

 

 

 또 한번 조선을 흔든 사건이 있었는데

대도 임꺽정을 잡아 죽인 사건입니다.

 

 

임꺽정은 양주의 백정출신으로

이른바 의적으로 통하던 인물로

힘이 장사이고 날쌔고 용맹스럽고

 당시 양반세력에 대한 불만이 많아

의적 활동을 해 백성들에겐 환호의 존재

조정에서는 골치 덩어리였습니다.

 

 

그를 잡는데 번번히 실패했지만

1562년 8월 남치근이 그를 잡는데 성공했고

잡힌지 15일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8년 뒤 남치근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3. 개혁주의자 - 변양걸

 

1546년~1610

 

1572년(선조5)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로 굉장히 늦은 나이였습니다.

 용양위 부장에 임명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수군을 거느리고 육로로 연강에 이르러

왜적을 맞아 싸워 이겼습니다.

 

 

1599년에는 명나라 군사 중에서 탈영하여

조선에 남아 있던 자들이 난동을 일으켰는데

그 난동을 신속하게 진압한 공으로 훈련대장으로

임명되었고 1604년 포도대장에 임명되어 임진왜란 이후

혼란한 서울의 치안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괴롭혔던 사회적 폐단을

 고치고자 애쓴 개혁주의자입니다.

그의 개혁정신은 제주목사 재임시절인

광해 원년(1608년) 선혜청 보고에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선혜청이 아뢰기를, "의금부 도사 한명욱(韓明勖)이 명을 받아

제주에 갔더니, 제주 사람들이 글을 올려 호소하기를,

'1년에 봉진하는 감자(柑子-귤)의 수량이 24운(運)에

이를 정도로 과다합니다. (세금이 너무 과하다)

 

관(官)에서 심은 나무는 적어 민간 소유의 과실을

 거두어야 수량을 채워 봉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관리들이 공용을

 핑계로 마구잡이 징수를 합니다.

 

 이에 백성들이 고초를 견디지 못하고

몰래 나무 밑동에 불을 질러

 징수 독촉을 피하고 있습니다.

 

부당한 징수로 인해 고통을 겪는

백성들을 위해 각종 폐단을 제거한

백성을 사랑한 포도대장이였습니다.

 

 

 

 

 

 

 

 

 

 

 

4. 북벌을 추진한 - 이완

 

1602~1674

 

병자호란 때 정방산성 등 여러 곳에서 분전했고

 최명길의 천거로 무관으로서는

 드물게 승지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후 포도대장을 역임했고, 효종이 즉위하고

 효종의 군사력 증강 정책에서

어영대장을 맡아 병제와 군비를

재정비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훈련도감의 대장도 지냈는데

원래 훈련도감 대장자리는 공신이나

 외척이 임명되곤 했지만 이완은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 효종 사후 현종 때까지도

 훈련도감 대장 직책에 있었습니다.

 

 

▲ 이완의 실제 묘

 

 

이후 현종 말년에는 우의정까지 지냈으나

 현종이 죽던 1674년에 사망했습니다.

 

 

사후 정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효종과 현종

 두 부자와 함께 한 인물입니다.

 

 

 

 

 

 

 

 

 

 

 

5. 백성들의 칭송을 받은 - 신명순

 

 

1798(정조 22)∼1870(고종 7). 조선 후기의 무신.

 

신명순은 경사에 능통하고 문예에 뛰어났습니다.
1820년(순조 20) 음보로 남행선전관이 되었고,

같은해 무과에 급제하였습니다.

 

 

1826년 함흥부사가 되어 빈민이나

 이재민을 잘 구제하였고,

 병적처리와 범죄다스리기를

엄정하게 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1838년(헌종 4) 봉산군수가 되어 유생들에게

강무할 것을 부과하였으며,

흉년이 크게 들자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습니다.

 


1851년(철종 2) 전라우도수군절도사,

1860년 좌변포도대장과 총융중군을 지냈으며,

1862년 진주의 황지 일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절도사로 파견되어 백성을 달래고

곡식을 내어 곤궁함을 구원하여 안정시켰습니다.

 

 

 

▲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신임이 두터웠으므로 1864년(고종 1)

다양한 관직에 올랐고, 1865년 좌변포도대장 등을

 거쳐, 1866년 어영중군이 되었습니다.

 

 

 

▲ 조선말기 포도대장의 실제사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글 - 조선시대 마피아 검계와 그의 천적 포도대장 장붕익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오유석 2016.10.20 15:01 신고

    27세면 오히려 이른 나이입니다.
    문과 편군 급제자 나이가 35세
    무과도 대동소이하게 32~34세 가량 됩니다.
    지금 기준이 아니라 당시 기준으로 따져봐야할 듯합니다.